길이 되어 주시는

글쓴이: 아홉그루   
글쓴곳: 달 팽 이 | 2010/02/08 10:06

누군가 인생은 어둠 사이에서 반짝하고 빛났다가 꺼지는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반짝 빛나기 과정의 그 찰라에서 나의 청년기는 시작되었다. 스승님께서는 나의 청년기 호흡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아끼며 지켜봐 주셨다. 어떤 인연이었기에 흐트러짐 없이 나의 인생에 지표가 되셨고 의미가 되셨고 길이 되어 주셨을까.

대학 2학년 어느 봄날, 첫 누드 수업 시간이었다. 난생처음 남성의 육체를 현상으로 볼 수 있다는 기대(?)와 부담으로 잠을 설치게 되었고 벼르고 벼른 누드수업에 지각을 했다. 실기실의 침묵, 모든 학생들이 모델을 향해 열심히 그림을 그릴 때 나는 죄지은 사람처럼 구석자리에서 고개만 숙인 채 차마 모델을 볼 수 없었던 기억. '그럼 그렇지 아무리 전라의 누드모델이라지만 그 부분(?)까지 보여주는 것은 아니겠지' 그렇게 위안하면서 모델이 입고 있었던 순백색 삼각속옷에 더욱더 나의 시선에 잡혔던 기억. 누드모델보다 모델이 입고 있었던 속옷을 강조하면서 캔버스를 채우고 있을 무렵 난데없이 나의 뒤통수를 치면서 스승님 왈 '너 그 빤스 뭐 할려고 그리느냐?' 결국 실기실은 웃음바다를 이루었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쩔쩔매고 있었던 흑백 사진 같은 기억. 수업이 끝날 때 즈음 내 어깨를 도닥거려 주셨던 스승님의 손길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

그 후 나는 대학을 마치고 유학을 갔다. 어리버리 유학생의 고단한 일상도 놓아두고 스승님께 아주 긴 절망 같은 편지를 보냈었다. 예술과 인생에 대한 지표가 담긴 편지를 답장으로 보내 주셨던 스승님. 지속적으로 편지를 보내면 보낼수록 스승님께서는 예술과 철학의 깊이를 내게 보내주셨고 그 힘으로 무사히 유학생활을 마칠 수 있었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후 어느 낡은 일본식 2층 건물에 화실을 열었다. 그곳에는 나의 청년이 탄식처럼 숨 쉬고 있었다. 겨울 초입 스승님께서 초라한 화실을 방문해 주셨고 마치 생의 마지막 보류인 듯 그렇게 그린 나의 그림을 보고 아주 간략한 언어로 '바람 한점 들어갈 틈도 없이 화면이 철벽으로 꽉 막혀있구나', '멀리 보거라 00아!' 라고  인생의 간격을 이야기해 주셨던 스승님. 고압 전류가 흘러 나의 전신이 타들어 가는 것처럼 여러 날 나는 호흡하기조차도 힘든 시간을 앓았던 기억이 있다.

그 후부터 현재까지 습관처럼 나는 스승님께 나의 삶의 흔적들을 보여 드리고 있다. 정직하고 자상하신 스승님께서는 세상을 감당하는 자의 엄격함을 한결같은 모습으로 실천해 주시고 용기를 주신다.

시간의 틈을 놓고 내 청년기는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기억들을 헤집어 보면 고색창연한 옛 건물들의 침묵이 느껴진다. 하나의 물체 혹은 장소, 기억이 길이 되어 열릴 때가 있다. 진정한 길은 단 한 번에 활짝 열리는 법이 없는 듯하다. 매번 갈 때마다 그 길을 다시 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도 스승님을 통해 배웠다.

이렇게 시간이 흘렀고 내 삶 속에서 스승님은 똑같은 빛깔로 살아 있다. 스승님께서 얼마 전에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이라는 책과 '철학, 죽음을 말하다'라는 책을 선물해 주셨다. 그 책들 속에서 숨쉬고 느꼈던 나의 결론을 스승님의 삶과 예술로 함축해 본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無는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탄생하는 것이라는.....,

엄격한 질서는 오히려 무질서를 낳는 경우가 있는 듯 여겨진다. 무질서 속에서 숨 쉬는 유연한 질서야말로 이성과 감성으로 함께하는 실천주의 아닐까. 내게 스승님의 모습은 그러하다.


2010/02/08 10:06 2010/02/08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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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가즈랑 2010/02/08 13:10 댓글 수정/삭제

      지금까지 저는 길을 보여주는 스승이 없다고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이 글을 읽고 돌이켜보니 제가 손을 먼저 내놓지 않아서였던 탓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힘들어도 혼자서 끙끙 앓으면서도 내 문제는 다른 이가 이해할 수 없는 나만의 문제라는 그런 고집 때문에요. 참 아쉽습니다. 앞으로 얼마만큼 새로운 선생님을 만날지는 모르겠지만, 학교라는 울타리가 아니더라도 스승님을 꼭 만나서 길을 묻고 싶네요.

    2. 非틀 2010/02/08 15:21 댓글 수정/삭제

      이상한 일, 저는 초등(국민)학교 1학년 담임이었던 선생님 말고는 아무도 떠오르지 않아요, 거참. 아, 한 분 더 계시는구나. 고등학교 1학년 때 미술선생님, 아아, 그 새카맣던 눈동자에 훌러덩 반해 서너 달 열병을 앓았던 기억이...

    3. rainyvale 2010/02/09 08:10 댓글 수정/삭제

      어쩐지... 미술 하시고 바다건너 공부까지 하신 분이셨군여. 멋져요. 여기가 어쩐지 참 예술스러운 블러그다 싶었어요. ㅎㅎㅎ

    4. 아거 2010/02/09 13:28 댓글 수정/삭제

      너바님 이야기인간요? 그러고 보니 모든게 달라보이네요. 색감도, 글꼴도, 디자인도.

        너바나나 2010/02/09 14:50 수정/삭제

        개인신상이 나온 얘긴 이 얘기가 유일한 듯싶구만요. 글쓴이:아홉그루 얘기입니다!! 색깔, 글꼴 등 다 아홉그루가 시키는대로 만들었구만요.

    5. 너바나나 2010/02/09 19:15 댓글 수정/삭제

      => 난생처음 남성의 육체를 현상으로 볼 수 있다는 기대(?)와 부담으로 잠을 설치게 되었고 벼르고 벼른 누드수업에 지각을 했다.

      이러니까 변태지!!!

      그나저나 요즘 그림은 어떤가요? 바람 좀 들어갈 틈은 있는지요? 그림은 모르겠는디 사람은 아직 바람은 들어가도 물방울 못 들어갈 듯싶은데..

      물론, 전 바람같은? 존재라 잘 들어가고 있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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